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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여름하늘에 어린 추억

靑竹2010.07.19 21:23조회 수 1254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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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맛비가 한바탕 훑고 지난 탓에 하늘이 가을이 무색할 정도로 푸르고 시계가 길었다.

 

 

 

"아이고 이 미련한 놈아, 그렇다고 이렇게 야심한 밤에까지 그러고 있단 말이냐!"

 

 

워낙 빈농이라 삯군들을 사실 형편이 못 되어 멀찌감치도 떨어져 있던 여러 군데의 손바닥 만한 밭들을 가꾸기 위해서는  순전히 부모님과 여섯 남매들 손이 필요했었다. 때문에 다른 집 아이들이 동네 어귀에서 뛰어놀던 시절에 우리 남매들의 휴일은 거의 논이나 밭이 무대가 되었다. 장남인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아버님께서는 '너도 이제 곡괭이질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며 나의 키에 맞춰 자루를 잘라서 만든 곡괭이 한 자루를 내어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랬자 72명의 급우 중 세 번째로 작은 키였으니 상당히 작은 몸집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아버지하고 엄마와 누이들은 서당골로 갈 테니 오늘 이 밭은 네가 책임지고 다 갈아엎고 집에 들어가거라."하시며 400여 평 정도의 밭을 가리키셨다. 마침 내 전용 곡괭이도 생겨서 신도 났던 터라, "알았슈"하고 호기롭게 대답은 했는데...

 

 

 

 

 

 

 

 

 

파종을 하기 전에 집에서 2km 정도 되는 그 밭에 똥지게를 메고 어지간히 퍼다 뿌렸었는데 어디 그렇다고 예전에 신발을 신고 일할 생각이나 했던가. 아버님께서 식구들과 서당골로 떠나시지마자 그 밭에 맨발로 뛰어들어 씩씩하게 곡괭이로 뒤집어 엎기 시작했는데 어머니께서 준비해 두고 가신 점심을 먹고 나서 죽어라 파대다 보니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하면서 쓰리고 아팠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가는데 아직도 3분의 1은 족히 남았으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푸른 하늘을 도화지삼아 흡사 누가 붓을 놀려 수채화를 그리듯 구름들을 채색하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여름해가 길다 해도 일단 해가 서산에 숨고 나면 어둠은 금방 찾아온다. 그렇지만 워낙 엄하셨던 아버님의 지엄하신 명이라 집에 갈 생각은 꿈조차 못 꾸고 앞이 잘 보이지도 않는 어둠 속에서 씨근덕거리며 곡괭이질을 하고 있는데 소쩍새 우는 소리에 머리털이 곤두서며 멀리 보이는 공동묘지 쪽을 자꾸만 흘끔렸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집 쪽 고개 너머로 회중전등임직한 조그만 빛 하나가 나타나 일렁이며 다가오는데 아버지셨다. "어이구,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허허. 어여 집에 가자. 배는 안 고프냐?" "야, 그런데 아직 많이 남았는데요?" "애비가 농담으로 그런 거지 설마 이 밭을 네가 어찌 하루에 다 갈아엎겠느냐? 어서 가자."

 

아무튼 이 일로 이틑날부터 발바닥에 똥독이 올라 온통 물집이 잡혀 며칠 고생했다.

 

 

 

 ▲발원지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아무리 물이 불어도 비가 그치면 금방 수위가 내려가는 중랑천이지만 아직 징검다리는 물 속에 잠겨 있다.

 

 

 7,8월 지긋지긋한 장마에 밭의 풀들을 매다 보면 밭 하나를 아직 김을 다 못 맸는데 어제 맸던 앞쪽 이랑에 벌써 풀들이 또 돋아나기 시작하기 일쑤였다. 뙤약볕에서 일을 하다가 꿀맛 같은  점심을 먹고 나면 부모님께선 아버님께서 궐련 한 대 피우신 뒤 그대로 땡볕으로 나가셔서 여전히 김을 매셨지만 자식들에겐 휴식 시간을 주시는 걸 잊지 않으셨다.

 

"저 쪽 소나무 그늘이 좀 시원하겠다. 거기서 좀 쉬다가 오너라."하시곤 했는데 커다란 소나무 그늘 밑에 곤한 몸을 누이면 늘 청명한 여름하늘이 다가왔다. 눈이 시도록 새하얀 구름들이 두둥실 떠가는 그 하늘을 늘 바라보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했었던가. 온갖 모양으로 변신하여 나타나는 구름들을 보며 나의 상상은 또 얼마나 펼쳐졌었던가. 조그만 새끼 구름들은 입안에서 솜사탕이 녹듯 점차 푸른 허공 중에 흩뿌려지며 뿌연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곤 했다.

 

 

 

 

 

 

 

그러다 곤한 잠에 빠져들곤 했는데 잠을 깨게 되는 경우는 세 가지였다. 첫째, 너무 오래 잤지만 피곤한 모습이 안쓰러워 내내 참으시다가 깨우시는 아버님 목소리와 둘째, 분명 잘 무렵엔 그늘이었는데 움직이는 해에 그늘이 저만치 벗어나 땡볕에 그대로 노출이 되어 바베큐가 되기 직전에 놀라 일어나는 경우였고, 셋째는 개미란 놈이 당차게 물었을 때다. 특히 거시기를 물렸을 때는 아버님께서 깨우시는 목소리가 들렸을 경우보다 기상 속도가 현저히 빨랐다. 허겁지겁 졸린 눈을 뜨고 바지를 내려 떨구려 해도 이놈들이 잘 놓아주지 않아서 애를 먹었었다.

 

 

벌써 그로부터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엔 힘들고 고되고 귀찮던 시절이 지금은 왜 그렇게 눈물이 나고 가슴이 저미도록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 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꽃같은 시절이여! 자전거를 세우고 그늘에 앉아 청명한 여름 하늘을 한 시간 넘게 바라보았다.

 

 

 

 

청명한 여름하늘에서 그리운 시절을 만나다.

 

 

 

 

 

 

 

 

 

 

 

자전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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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8
  • 아!!~~~

    날 좋다!!!!

     

    이런 날...

    가슴 저미는 글을 올리시는 청죽님...미오!!

  • 풀민님께
    靑竹글쓴이
    2010.7.21 23:45 댓글추천 0비추천 0

    아버님의 정이 그리우실 풀민님께 죄송한 생각이 드는군요.

    어째 힘은 좀 차리셨습니까? 날씨 정말 좋긴 하죠? ㅎㅎ

  • 같은 때에 어린시절을 보냈으면서도
    저에게는 그런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못 배운 죄로
    아들은 험한 일을 시키지 않으려 했던 아버지의 배려였는데
    그게 지나고 보니
    저에게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나밖에 모르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공연히 외할머니, 부모님을 탓하고 있습니다.

    일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여름에 깨밭을 매는 것이 가장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비닐을 씌워서 가꾸는게 아니고
    손으로 휘휘 젛어서 파종을 했던 때이니
    어린 꺠를 밟지 않으면서 풀을 뽑기가 어려웠었죠.

  • 구름선비님께
    靑竹글쓴이
    2010.7.21 23:50 댓글추천 0비추천 0

    제 기억으로는 도라지 밭을 가꾸는 일이 가장 끔찍했습니다.

    뿌리 사이가 어찌나 촘촘하고 사이에 끼인(ㅡ,.ㅡ)잡초들이 잘 뿝히지 않던지.

    한 이랑도 다 못 맸는데 벌써 뒷쪽에서 풀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지금 와 생각하면 그런 과정들을 거쳐 땅을 이해하게 됐던 일이

    삶을 사는 데 있어 많은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걸 깨닫습니다.

    다만, 제 아이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못하고 사는 게 답답하네요.

     

    도회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때로 전원생활을 막연하게 동경하지만

    막상 농촌으로 내려가면 무경험과 도시 문화가 주는 편의성의 상실감으로 인하여

    금방 좌절을 겪는 경우가 많죠.

     

    건강하세요. 선비님.

  • 이래서 왈바가 좋다~~~!!

    코끝이 시큰해 졌었더랬습니다~~~^^

  • 쌀집잔차님께
    靑竹글쓴이
    2010.7.21 23:52 댓글추천 0비추천 0

    쌀집잔차님의 감성도 만만찮으십니다. ^^

     

    어디 흔적이 있나 찾다가 자갈치에 가서 근황을 확인했습니다.

     

    화이팅입니닷!!!!

  • 마치 데자부를 보는 듯 합니다.

    제 이야기를 듣는 듯, 완전 공감이 가는 좋은 글입니다.

     

    'KBS 무대'의 한 장면입니다.

    2-30여년전 제가 즐겨 듣던 라디오 드라마죠. 

    2-3년전에도 우연히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꼭 이렇게 시작하곤 했죠...

     

    씬 1. 소쩍새 우는 밤, 남녀의 다소곳한 대화

    씬 2. 시냇물 소리 졸졸거리는 여름 개울가, 남녀의 속삭임

    씬 3. 매미가 요란하게 우는 한 낮, 멀리서 들려오는 어머니의 아들 부르는 소리..

    씬 4. 목탁소리 은은한 절간, 스님과 지친듯한  여인의 목소리...

     

    좋은 글 감사합니다.

  • 탑돌이님께
    靑竹글쓴이
    2010.7.21 23:56 댓글추천 0비추천 0

    저는 탑돌이님이 올려 주시는 글이

    훨씬 더 측정하기 어려운 깊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있은 연후라야 그런 글이 나올 테지요.

     

    그러고 보니 편리한 티비 탓에 라디오를 멀리한 지 오래도 됐네요.

    팝송을 즐기던 청년 시절엔 늘 소형 라이오에 이어폰을 꽂고 

    fm주파수에 맞춰 놓고 들었었는데요. 

    조만간 조그만 라디오를 하나 구입해야겠습니다.

     

  • 되돌아 갈 수 없기에 추억은 가슴 시린 것인 모양입니다.

  • 훈이아빠님께
    靑竹글쓴이
    2010.7.21 23:58 댓글추천 0비추천 0

    맞습니다.

    때로 피눈물 나던 고통마저 추억 속에서 곧잘 아름답게 승화되곤 하는 것도

    아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시절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는 때문인 것 같아요.

    늘 건강하세요.

  • 마지막 나이아가라 폭포 사진 2장은 정말이지 포스 작렬합니다.

    같은듯 하면서 다른.

    저는 캐논 G2 를 아직까지 사용하면서 500컷도 안찍었다는....흑흑...

     

     

  • Bikeholic님께
    靑竹글쓴이
    2010.7.21 23:59 댓글추천 0비추천 0

    ㅋㅋㅋ.

    저는 사진에 워낙 문외한이라 막 눌러대는 편인데

    제 사진이 멋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좀 의아합니다.ㅋㅋ

    그런데 이제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게 8개월인데 컷 수는 제가 몇십 배는 되겠군요.

  • 데자부에 100% 공감합니다.

    저 나이 얼마 안되긴 하지만... 나름 어릴 적 여름추억은 많은 편이라...쏙쏙 와닿네요.

     

    이런 추억들을 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청죽님이 부럽습니다.

     

    조금은 더럽지만, 오줌에 이은 똥얘기로...

  • 십자수님께
    靑竹글쓴이
    2010.7.22 00:01 댓글추천 0비추천 0

    가만? 십자수님께서도 촌에서 자라셨다고 했던가요?

    그렇다면 느낌이 대략 비슷하시겠군요.^^

    경험을 그대로 글로 옮긴 것뿐인데 부럽다니요.ㅋㅋ

  • 청죽님은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으십니다.허허

    대부분 장남이 아버지를 이해 하더라는........

  • 산아지랑이님께
    靑竹글쓴이
    2010.7.22 00:04 댓글추천 0비추천 0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가장 충돌이 많은 것도 장남이랍니다.

    오랜 기간 전쟁과 화해를 반복하여 겪는 이른바 애증의 관계랄 수 있지요.

    필연적으로 부모의 깊은 마음을 이해해 드리지 못한

    아들 쪽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를 하겠지만요.

     

  • 제 딸아이에게도 이런 추억들을 많이 남겨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늘 좋은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 sarang1207님께
    靑竹글쓴이
    2010.7.22 00:05 댓글추천 0비추천 0

    활발하게 왈바에서 활동하시더니 한동안 뜸하셨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사랑님.^^

    댁내 화평과 사랑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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